예수는 이 세상에 오셔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비범한 가르침 남겨

<칼럼>이상권 변호사 - 네 원수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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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매일] 기독교인의 비범성은 원수를 사랑하는데 있다. 오늘날 좋은 이미지를 상실한 기독교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므로 좋은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셔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비범한 가르침을 남겼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르침인 산상수훈의 일부인 마태복음 6:43-44에서 이렇게 가르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했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구약의 가르침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예수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 대신에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가르쳤다.

예수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할 일이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예수의 가르침을 계승한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사도 바울은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으며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으라고 했는데 원수를 선대하면 그가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릴 것이란 이야기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했으며,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가르쳤다.

예수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이를 가르쳤다. 예수는 신성모독죄로 산헤드린 불법철야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유대인들에게는 사형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양심을 저버리고 예수에게 십자가 사형을 선고했다. 예수는 죄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저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이런 기도를 드렸다.

“아버자.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저주하지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예수는 십자가 상의 기도를 통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셨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원수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원수에게 복수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정의의 요청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원수를 사랑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내세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이 세상과 저세상을 통틀어 완벽한 정의를 이루신다는 것을 믿을 때만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원수갚는 것을 그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사랑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원수를 사랑하는 삶의 결과는 어떤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는 삶은 원수들에게 엄청난 약점을 잡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뜻한다.

손자병법에는 위험한 장수의 다섯가지 유형이란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장수에는 다섯가지 위험한 유형이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장수라면 죽이기 쉽다. 자기만 살려고 애쓰는 장수는 포로로 잡으면 된다. 화를 잘 내는 장수는 모욕을 주면 된다. 청렴결백한 장수는 욕을 보이면 된다. 백성을 사랑하는 장수라면 백성을 괴롭히면 된다. 전쟁에서 상대방 장수의 약점을 잘 살펴서 이를 역이용하면 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고 이를 이용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장수는 백성을 괴롭히면 된다’고 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인데 때로는 이것이 큰 위험이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약점을 가지는 일이다. 싸움은 언제나 덜 사랑하는 자가 이기게 돼 있다.

세상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식이 부모를 더 사랑하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수많은 약취유인, 납치범죄가 성립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것은 약점이다.

하물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엄청난 약점이다. 이것은 매우 치명적이 약점이다.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구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십리를 가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봉이요, 이용의 대상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원수들에게 이용의 대상으로 내어줌을 뜻한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있을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므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비범성이다.그러나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만이 세상 사람들과 차별화되고,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오늘날은 그리스도인들의 정말 이 말씀을 순종할 때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에 좋은 이미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비범성을 드러냄으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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